제주 서쪽 한수리에 마련해 쓰던 작업실은 할머니집 밖거리°였는데도 할머니는 내가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셨다. 넌 대체 거기서 뭘 하냐, 밥은 벌어먹고 사냐는 할머니 물음에 금은방 비슷한 거라고도 해보고 장신구 만드는 사람이라고도 해보고 가르치는 사람이라고도 해보았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자꾸만 알쏭달쏭해하시는 눈치였다. 얼마 전 퇴근 후에 이제는 작은 이모댁으로 거처를 옮기신 할머니를 만나러 갔을 때, 나는 어떤 기지였는지 할머니께 오늘 내가 만든 거라고 끼고 있던 반지를 드렸다. 그랬더니 "맞다. 너 이런 거 만드는 일 하잖아." 하시며 곧 이해하셨다. 그때는 아, 이렇게 간단한 거였나 싶은 명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말로 증명해야 하는 순간들이 더러 있다. 왜 회사가 아닌 브랜드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부터 어린 나이에 어쩌다 그런 결정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와 같은. 흔하지만 나에겐 언제나 묵직하게만 들리는 그 질문들에 가장 멋진 답을 내리기 위해 한순간 얼어버리곤 한다. 그러다 시작한 말이 길어질 때도 있는데, 그 말미에는 어쩐지 내가 더 아리송해지는 듯하다. 스스로 정리되지 않은 채 뱉어지는 말들에 공허하다는 생각도 한다. 한편 남들에게 내 취향을 드러내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말로 전달하는 능력은 필연적으로 갖추어야할 만하나, 또 제품(혹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너무 많은 이야기는 그의 본질을 흐리기도 한다. 디자이너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한 96세 할머니께 나를 설명하는 가장 쉽고 효율적인 방법은 일의 결과물을 손에 쥐어드리는 것이었다. 거기에 붙은 말은 '오늘 내가 만든 것'이라는 한 마디였다. 이 일로 나는 이처럼 창작의 방향을 재설정하게 되었다. 내가 어떤 걸 하는 사람인지 설명하기보다 내가 만든 물건이 사람들에게 가닿아 사용되기. 드러내는 이미지와 문장은 간결하기. 이 둘로도 명쾌하게 설명되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면 이제부터 고려해야 할 점은, 내가 만든 물건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게 한다면 그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고, 그 중에서도 나다운 쪽은 어느 것인지, 아름답지만 사용하기에 불편하진 않을까와 같은 것이다. 질문들이 금방 가지를 친다. 그로 하여금 머리가 복잡하고 어렵기도 하지만, 질문이 있어 답을 낼 수 있으니 고무적이다. 물론 나는 틀릴 수 있으나, 오답임을 깨달은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질문하고 답을 내는 과정을 반복하면 된다. 내가 이때 종종 떠올리는 방법은 디자인적 사고(Design Thinking)°로, 단순하지만 다양한 분야에 적용이 가능하고 효과적이다. 아래는 디자인적 사고의 5단계이다. 이 과정은 언제나 반복될 수 있다. 공감하기(Empathize) : 사용자의 환경을 관찰하고 숨겨진 니즈(Needs)를 파악. 문제 정의하기(Define) : 공감한 내용을 바탕으로 진짜 문제를 재정의. 아이디어 도출(Ideate) :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다양한 해결책을 창출. 시제품 제작(Prototype) : 아이디어를 빠르게 구현하여 구체화. 테스트(Test) : 실제 사용자에게 검증받고 개선. 근래 브랜드의 새로운 제품을 구상하며 많은 면에서 전보다 더 나은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더 예쁘고 더 실용적이고 더 나다운 것. 할머니와의 이야기로 더 명쾌한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조금 더 부지런을 떨어야 하겠으나, 우선 방향만큼은 또렷해져 가뿐하다. 밖거리° : 제주 전통 주거 형태로, 한 울타리 안에 두 채의 집(안채·바깥채)을 두고, 부모 세대(안거리)와 출가한 자녀 세대(밖거리)가 독립적인 경제 생활을 영위하며 조화롭게 공존하는 독특한 주거 방식 디자인적 사고(Design Thinking)° : 인간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복잡한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사용자 중심의 접근 방식.